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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반주란 무엇일까요?

좋은반주자란

좋은 반주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성도들도 좋은 반주를 기대합니다. 좋은 반주란 무엇일까요? 무슨 기준이 좋은 반주와 그렇지 않은 반주를 나눌까요?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반주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사전만 찾아봐도 반주의 의미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노래나 악기를 돕기 위한 연주’가 반주입니다. 우선적 역할은 돕기 위함이고 동시에 그 자체가 연주의 역할을 합니다. 돕기 위함이라면 노래하는 회중을 위함이겠죠. 그러므로 좋은 반주였는지 아닌지는 회중이 판단할 수 있습니다.

회중은 대부분 음악 전공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오늘 반주가 좋았다고 생각할까요? 한 번 회중의 입장이 되어보세요. 그 입장에서 좋은 반주는 노래하기 불편하지 않게 하는 반주가 좋은 반주일겁니다. 반주자가 아무리 멋있게 반주를 한다고 해도 회중이 불편하면 그건 좋은 반주가 아닙니다. 회중의 상황에 맞추는 게 중요합니다. 회중의 상황은 무엇일까요? 우선 연령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아유치, 초중고, 청장년이겠죠. 유아유치부 아이들은 노래를 금방 배웁니다. 하지만 음역대가 좁고 낮아서 음을 어른들만큼 정확히 잡진 못합니다. 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목소리들의 조화라도 아이들의 목소리로 들린 땐 아름답고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아이들 반주는 멜로디를 함께 치면서 굵은 선을 유지하며 반주하는 게 좋습니다. 볼륨도 좀 큰 게 좋습니다. 아이들은 반주 소리가 크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게 도움을 줍니다. 초중고 청년까지는 볼륨에 그렇게 민감하지 않습니다. 반주의 기법에도 민감하지 않은 편입니다.

하지만 장년부터는 얘기가 좀 달라집니다. 우선 시끄러운 볼륨을 불편해합니다. 청년 땐 괜찮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서글프기도, 놀라기도 하죠. 언제부턴가 찬송가가 좋아지기 시작하고요. 그러므로 장년들이 주로 있는 예배에서의 반주는 튀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젊은이들은 반주와 연주의 역할을 동시에 해주는 반주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장년층은 말 그대로 반주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는 반주를 선호합니다. 이 선호는 나쁘다 옳다 판단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면 주름이 생기듯 자연스러운 겁니다.

연령대 상황과 달리 또 하나의 상황은 예배의 종류입니다. 새벽예배, 주일 낮예배, 금요 기도회, 찬양예배 등에 따라 유연하면 좋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새벽에는 키와 볼륨을 낮추고 반주의 움직임을 줄이는 게 새벽 정서에 어울립니다. 주일 낮 예배는 사실 성도들이 가장 기대하는 예배입니다. 그만큼 찬양시간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시간에 하는 찬양이 1주일에 하는 거의 모든 찬양인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잘 부를 수 있게 받쳐주는 역할이 중요합니다. 볼륨이 크면 미간이 찌푸려집니다. 그렇다고 주눅 들어서 너무 줄여버리면 그건 답답합니다. 빠른 곡을 반주 할 때 건반, 기타, 드럼이 적절한 리듬을 맞추면 부르기 흥겨워집니다. 하지만 셋이 서로 다른 생각과 패턴으로 연주하면 그냥 시끄럽기만 합니다. 찬양 곡의 주제가 ‘거룩’인데 피아노가 고음을 계속 치면 묵상에 방해를 받습니다. 사람은 고음보다 저음이 거룩이라는 느낌과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찬식의 경우를 예로 들 수도 있습니다. 성찬식 할 때에도 드럼과 기타를 치는 경우는 드뭅니다. 거의 피아노 혼자 합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하며 온갖 텐션을 넣으며 화려하게 반주한다면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다른 상황에선 어울릴지 몰라도 그 상황엔 별로라고 느낍니다.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몰라도 한국적인 상황은 그렇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다시 생각해봅니다. 좋은 반주란 무엇일까요? 결국 못 치지 않는 반주가 좋은 반주입니다. 여기에서 못 친다는 건 코드를 잘 모르고 테크닉을 몰라서 못 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못 친다는 건, 상황과 분위기에 관계 없이 그냥 내 하던 식으로 반주함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잘 친다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변형이나 기술을 발휘 할 때와 참아야 할 때를 안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새로 온 전공자보다 오래 섬기신 집사님의 반주가 나는 더 좋다…’ 좋다의 의미가 바로 그겁니다. 반주만 따로 떼어서 보면 전공자의 반주가 더 음악적으로 공교할 수 있지만 회중을 돕는 역할로서는 집사님의 반주가 더 좋은 반주가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배반주에 있어서 공교하다는 의미는 그 측면에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반면, 회중찬양이 아니라 전공자의 노래나 악기에 맞춰 반주할 땐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겠죠. 반주자에게 절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전공자의 연주력에 따라 반주의 기술적인 부분도 함께 맞춘다면 더 아름다운 앙상블이 될 겁니다.

서두에 반주는 돕는 연주라고 했습니다. 사실 돕는 역할만 잘 할 수 있어도 좋은 반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연주로서 역할까지 감당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성도들이 느낄 때 부르기 쉽게 도와주기도 하지만 반주 소리가 참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면 어떨까요? 사실 예배에서, 성도들이 계속 노래하지는 않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분들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사와 삶이 일치하지 않아 노래를 머뭇거리기도 합니다. 목이 아파서 좀 쉴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분들은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고 다른 성도의 노래와 반주를 들을 때 그 공교함과 어울림 속에서 다시 새 힘을 얻기도 합니다.

음악은 하나님이 만든 질서에 있기 때문에 그 질서를 잘 지켜서 음들을 조합하면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아름다운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입니다. 음악도, 사람도 한 분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부턴 그냥은 안 됩니다. 공부하고 애써야 그 지점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주자의 목표는 돕는 반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지점과, 그 자체가 찬양의 연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지점을 향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반주로서 역할을 선택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조금 더 맛있는 음식, 조금 더 큰 집, 조금 더 좋은 것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더 좋은 찬양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그것은 조금 이상한 것이 아닐까요. 그 분께 너무 죄송한 게 아닐까요? 네, 마음이 담긴 찬양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반주자에게 그냥 마음만 담으면 됐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반주자들은 순수한 찬양의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음악을 다하여 공교한 반주를 하고 싶은 열정도 그 분을 향한 마음이거든요.

하나님은 음악의 창조자입니다. 음악에 갈증 느끼는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분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을 향한 갈증은 누구보다 크신 분입니다. 반주 자체는 본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반주에 임하는 태도는 결국 그 분과 나와의 본질적 관계와 연결 되어있습니다. 서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사이가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니까요.

우리 힘낼까요? 때론 힘겹지만 주신 은사 기억하며 애쓰는 이 땅의 모든 반주자들을 응원합니다. 이 글이 여러분을 주눅들게 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을 웃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은 2008/04/02 독일 Jesus ?hnlicher werden 집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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