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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는 연주가 아니라 연구를 위해 해야 합니다

카피를 합니다. 좋은 연주를 따라 하기 위해서입니다. 테크닉을 자연스럽게 연습하게 됩니다. 게다가 밴드에서 각각 자기 파트를 카피해서 합주하면 근사합니다. 당연히 카피한 곡 중 가장 멋진 곡을 가지고 공연을 합니다. 박수와 갈채를 받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연습을 합니다. 이번엔 편곡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봐도 내 아이디어와 연주는 별로입니다. 공연은 다가옵니다. 또 다시 카피하여 멋진 공연을 하게 됩니다.

입시가 다가옵니다. 뭔가 나만의 것으로 심사위원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신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그간 카피했던 남의 것입니다. 카피한 곡은 손가락이 술술 돌아가지만 내 것으로 하기엔 자신이 없고, 시험인데 즉흥으로 연주하는 것은 엄두도 안 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세요. 카피곡을 다들 줄줄이 들고 오는 상황에서 심사위원들은 무엇을 원할까요? 10년 전인가 서울예대 실용음악과 입시 반주를 해 본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찰리파커의 연주를 카피해갔습니다. 딱 8마디 듣고 끊더라고요. 그 친구는 진짜 실력을 못 보여줘 억울해 했지만, 진짜 실력이 있다면 왜 카피를 했겠습니까?

심사위원들은 테크닉이야 자신이 4년 동안 가르치고 키워서 길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테크닉을 더 키워주고자 학생을 뽑는 게 아니라 그 학생이 가진 독창적인 잠재력을 키워주고자 뽑는 겁니다. 만일 테크닉만으로도 들어갈 수 있는 학교가 있다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카피로 좋아보이는 공연만 보여주는 데 4년을 허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연 준비하다가 한 학기가 다 갔네!’

이 말에 여러분 공감하실 겁니다. 대학 4년 동안 배우고 싶은 것은 음악입니다. 음악을 연주하기 이전에 ‘음악’ 자체를 배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카피해서 공연하다가 끝납니다. 공연에서 즉흥연주를 한다? 벌벌 떨 일이 되어버립니다.

공연이 먼저입니까? 음악이 먼저입니까? 기본적으로 공연(연주)을 위해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지만 분명히 공연보다는 음악 자체가 먼저입니다. 아무리 공연을 멋지게 한다고 해도 음악이 내 안에 채워지지 않으면, 그리고 내가 공연한 그 음악이 어떤 구조인지, 최소한 코드가 어떤 원리인지 알지 못하면 답답해집니다. 언제 가장 답답하고 한심해집니까?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창의성은 찾아볼 수 없고 카피만 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답답해집니다.

저와 스승님 이야기를 조금만 할께요. 저는 독일에서 재즈피아노를 공부했습니다. 6년 반이라는 세월을 먼 곳에서 보냈습니다. 저를 가르쳐주신 스승님은 독일 친구들도 ‘그 교수님은 Himmel(하늘)이야‘라고 인정하던 Leonid Chizhik이라는 유럽의 거장입니다. 러시아 사람이었지만 실력만으로 독일에서 가장 상급 교수직을 역임했고 지금은 은퇴하셨습니다. 그 분의 연주는 환상적이어서 레슨시간에 항상 청강생들이 북적였습니다. 소문 듣고 구경하러 온 학생들이었죠. 가끔 시범보이는 플레이를 듣기 위해섭니다. 저는 교수님이 시범만 보이면 받아 적기 바빴고 제발 연필 좀 내려놓으라고 매번 그러셨습니다. “음악을 흉내 내지 말고 네 음악을 해라” 이 말을 거의 레슨시간마다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도 적는 걸 못하게 해서 몰래 레슨을 녹음하기도 했습니다. 적어서 공부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게 아니라 틀에 박힐까봐 저를 교육하신거죠. 6년 반 동안 공부하면서 스승님이 제게 카피를 몇 번 시키셨을까요? 단 한 번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재즈피아노 레슨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겁니다. 즉흥이 생명이니까요. 그의 제자들은 코드 하나만 있으면 자유롭게 음악을 창조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재즈피아노 뿐 아니라 재즈학과의 다른 악기 전공 학생들도 한국식으로 완전 통째로 카피를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만드는 훈련을 하기 때문에 1,2학년 때엔 좀 어설퍼도 고학년이 되어가면서 창조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제안하고 싶은 것은 통카피를 하지 말고 부분카피를 하라는 것입니다. 음악을 듣다보면 전체가 다 좋을 수도 있지만 유독 귀를 당기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부분을 카피하는 겁니다. 어떤 코드였길래, 앞 뒤가 어떤 분위기였길래, 무슨 악기가 빠지거나 추가됐길래, 멜로디가 어떤 흐름이길래 나의 귀를 당겼나 ‘연주가 아니라 연구를 위한 카피’를 하라는 겁니다. 그 분석이 반복되면 자신만의 매뉴얼이 생깁니다. 어떤 분위기를 내려면 이렇게 하면 근접할 수 있다는 등의 매뉴얼 말이죠. 만약 코드 중심의 부분카피를 했고 화성적인 원리를 파악했다면 이제 다른 곡에서 비슷한 진행이 나왔을 때 응용할 수 있을 겁니다. 키가 바뀌어도 원리를 연구했으므로 응용이 가능합니다.

솔로 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꺾이고 무슨 음을 강조했길래 이 사람이 치면 이렇게 맛깔날까 연구하는 겁니다. 실용음악 하는 분들 잘 생각해보세요. 분명히 같은 음을 쳤는데 내가 치면 뭔가 맛이 없습니다. 그 원인이 뭘까 그 사람의 연주를 연구해야 합니다. 연구를 해보면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일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이제 패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보게 된다면 자기 것이 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저에게 ‘재즈의 비밀’이라는 저만의 노트가 있습니다. 그냥 음악 듣다가 ‘와!’ 하고 귀에 꽂힐 때 부분 카피하는 노트입니다. 대부분 한 두 마디 카피입니다. 길어야 몇 마디입니다. 그렇게 카피를 해놓고 여러 가지를 분석하여 옆에 설명을 달아놓습니다. ‘…이럴 경우에 사용 가능’

통카피를 완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에겐 그렇게 공부하는 게 가장 효율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연만을 위한 습관적 통카피는 멀리 봤을 때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더라도 분석을 하고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연구를 위한 전체카피는 너무 고되잖아요. 부분적으로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동영상은 스승님의 1987년 독일 뮌헨 라이브 공연입니다. 유학시절 재즈화성학 수업에서 숙제를 내줬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솔로를 카피하고 분석한 걸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15분간 해석하고 설명하는 수업이었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긴 카피를 했던 곡인 듯 합니다. 학생들이 모두 음악에 빠져 멍 하니 있었던 장면이 기억이 나네요. 연주가 끝나고 하도 질문들을 해서 (물론 독일어로 ㅡㅡ;) 힘겨워하니까 친구들끼리 왜 자꾸 질문해서 ‘림’을 힘들게 하냐고 자기들끼리 눈치를 주고받으며 저를 도와줬던 기억이 납니다.

연주가 아닌 연구를 위한 카피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시고, 제 스승님의 연주도 한 번 감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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